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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택/동시대 예술 연구자, 독립 기획자
풍경–양식
‘매체(media)’로부터 ‘주체(subject)’는 자유로울 수 없다. 그저 상상의 영역에서만 그 어떤 외부적 영향력으로부터 완전히 괴리된 이상적 주체가 존재할 수 있을 거다. 그만큼, 아니 도리어 그러하여 애초에 매체를 주체의 성립 조건으로서 전제토록 해야 할 수도 있겠다. 그와 같이 매체 담론 연구의 관점을 따르자면,–그 가운데 무엇이 우선하는지 또한 우선해야 하는지 우리는 영원히 알 수도 또한 알 필요도 없겠지만–매체가 주체의 정체화(identification) 과정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변치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조명해야 할 것은 ‘관계(relationship)’가 된다. 관계의 현현과 그 속성의 기저가 수신자와 송신자 사이를 매개하고, 바로 그 매개의 방식을 따라 소통(communication)의 범주들은 형성될 테며, 그렇게 형성된 범주들이 주재하는 주체들의 양상은 그 자체로 당대를 표상하는 개별의 층위를 점유하는 한편, 다시금 이들은 이합집산해 오늘날 우리가 ‘이미지(image)’라 부를 하나의 경향적 흐름을 꾸며내게 된다. 이상의 관계성 맥락에서 미적 주체의 위상은 구축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중적 체계, 즉 매개의 매개임을 규명함과 동시에 확보해야 하는 것으로서 주체(성)의 증빙은 곧 병렬연결의 자기 회로로 구성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이때 병렬식의 사고 방식이란, 그 유형의 양태가 평행적일 수 있고도 동시적일 수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편중적(dominate)이기보다는 다중적(multiple)인 구조의 인가(認可)와 연관이 있다. 결국 평상의 일반적 상충의 구조로 보통은 단수의 이데아(idea)를 병렬적으로 형성한다는 건 단수적 복수 혹은 복수의 단수들과 같은, 어쩌면 낯선 익숙함(uncanny)의 개념을 닮은 자기모순형 내면의 외연화를 지시한다. 그렇다면 예술 범주에서 소통과 관계를 둘러싼 분류하기(categorisation)의 실천을 도모하는 객체로서의 창작 주체와 그 수행의 결과로서 작품 / 작업의 의미는 역시나 매체라는 차원에서 물리성에 기초한 조형의 서사를 외재함과 함께 관념 층위에서의 사유를 동시적이면서 평행적으로 포착할 수도 있다. 이렇듯 다중 투영된 인식의 갈래들은 주체의 의지에 의해 전통이나 과거의 기준에 부합하거나 그것을 폐기하는 형식으로 각기 응집하거나 소산한다. 이를 마주 선 또 다른 연계 주체(들)의 입장이 추동할 수 있는 가치는 무엇이며, 그로부터 도달할 신성의 영토는 또 어디인지를 홍자영의 조각들은 가리킨다.
서로 이질한 개념의 조건들이 시간과 공간의 축을 분자(molecule)로 혼종의 시공을 창출한다. 이는 퍽 전통적인 범례가 될 법한 차용에서부터 동시대의 시공간을 가로지른다. 홍자영은 초기 작업에서 관객의 참여를 중심에 두고 수행이라는 발화의 법식(法式)을 본래의 창작 주체에서 관람의 주체에게로 적극 이전함으로써 존재의 속성을 객체의 그것과 혼재토록 하는 한편(〈포석정〉(2017)의 경우), 무의식적 상황을 의식적인 것으로 역전시킴에 있어 ‘틀 짓기(framing)’의 전략으로 점철하는 형이상학적 편집의 행위를 통해 이른바 포스트모던형의 ‘재매개(remediation)’를 현시(〈3 Walls〉(2021)의 경우)키도 한다. 그 미적 실천의 한가운데 자리하는 예술 주체–창작과 관람의 주체 모두를 포함하는–의 위상에서 문화를 이루는 수많은 경계의 의미들이 갑작스레 무효한 것으로 전락하는 예술 경험은 인상 깊다. 특히나 이후로 안정화하는 매체 층위에서의 시도는 단순히 다원화의 가치를 추종하는 작가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부터, 나아가 그가 자기 조형 문법의 구축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 가늠케 한다. 이로써 내용과 형식의 양가적 차원을 본인 작업의 범주 안에서 확고하게 확보함으로써, 그 관계 구도를 비중하는 주요한 방법론적 축으로 홍자영이 설정하는 ‘문화(culture)’는 이렇듯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포함하는 상태에서 제 소요의 형태를 한정한다. 개별의 조각으로 존재하는 파편의 서사(들)는(은) 그 기능과 역량을 특정 맥락과의 동기화(activating) 과정을 통해 제 의미를 자인하기를 기다린다. 이는 ‘구성(configuration)’이 작가의 작업에서 우선의 목표임을 추정할 수 있게 하는 자명한 근거로, 그제야 관람의 주체들은 홍자영의 조각(들) 곁이 아닌 그것(들)이 구축하는 특정한 환경 내에 자리함을 자각할 수 있으리라. 작가의 작업을 지지하는 서구의 픽쳐레스크(Picturesque) 미학(〈기암괴석〉(2022) 및 〈호〉(2022) 등의 경우)과 종교 건축의 양식(〈Waterwall〉(2021) 및 〈Wall Fountain〉(2022) 등의 경우) 또는 고대 신화의 상징(〈물에서 온 여신상〉(2023)의 경우)이나 동양의 산수(〈Beyond Landscape〉(2022)의 경우)와 전통 조각(〈12개의 산 9개의 돌 6리터의 물〉(2020) 및 〈팔각괴석받침〉(2023) 등의 경우) 그리고 공예(〈The Gate of Wind and Water〉(2023) 및 〈Fossil Pond〉(2024) 등의 경우) 부문의 ‘이미지’ 차용은 일종의 미적(어쩌면 자의적이면서 정치적이기도 한) 표상으로 부유한다. 그렇게 작가 작업에서 전통은 동시대 근본주의의 계기로 자신이 잠재적임을 선제하는 일의성(univocite)에 귀결하면서, 이로부터 존재(being)의 의미가 형식으로서의 매체 위에 투사된 물적 형태로 현존한다. 그건 (덮어 쓰인) 이미지다. 다만 그러한 상의 목적은 무언가를 은폐하는 데 있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작가라는 개인을 다수의 일원과 유일한 객체로 구별함과 동시에 그 정체성을 다중화하는 것으로 점철한다는 건 분명 특이할 효과다. 그처럼 단서들을 되짚어 가다보면, 홍자영의 작가적 실천에서 그 심도의 위치가 미적 연출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음을 짐작게 된다. 그가 구축하려는 성역(화)의 풍경은 그 자체로 자기 서사의 완성을 위한 일련의 극적 식별–평가–선택의 프로세스(sourcing)이며, 매체 맥락에서 그 구성의 의미는 사회 및 자기 응집된 재귀적 경향으로서의 문화를 이미지의 방식으로 차용과 투사함으로써 역사의 가치를 당대적으로 소환한다. 이미지와 역사의 이러한 관계망 형성의 시도는 구체적인 사건의 역사적 맥락을 상대적으로 평평하게 만들고, 그로부터 역사를 향한 개인의 입장이자 태도를 다시금 창작과 관람의 자리에서 주체적으로 확인케 하는 무대를 마련한다. 역사적 상징인 문화의 속성을 이미지를 지지체로 현현하는 과정에서 관련한 이들 모두는 소위 사유의 시공에서 조우한다. 홍자영의 작업은 바로 그 특별한 미적 순간을 조장한다. 그건 마치 자유로이 행하는 임의적 초점과 배율의 조정과 다름없다. 이를 작가 고유의 개념과 조형적 문법으로 방법론화 할 수 있는 가능성은 공감 행위의 배태에서 발아한다. 집단을 표상하는 개인으로서의 예술가라는 위상을 동시대적인 커뮤니티를 경로 삼아 점유함으로써 그는 각자의 주체적 입장을 보장하면서도 그와 함께 자신의 독창성을 확보한다. 주관적 자의의 무엇을 공적인 객관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작가는 “자연스러움”의 감각을 형식적으로 논리화하는 전략을 택하는데, 이는 서로 다른 각각의 치수를 비중을 다중화하는 식의–수사적으로 모던과의 차별을 주장하는–포스트모던 예술 실천과도 연관이 있어 뵌다.
인공도 자연도 아닌, 또는 인공이기도 자연이기도 한, 혹은 그 양자일 수도 있거나 그렇지 못할 수도 있는 무작위의 표준으로 존재하는 홍자영의 풍경은 어느새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기념비들을 재배치함으로써 그와 같은 인식으로 주체들을 인도하는 당대의 조건들을 상기한다. 역사, 그리고 본인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What Is History?)』(1961)를 통해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라는 주체의 주관에 의해 기술, 아니 창조되는 것임을 상호작용의 차원으로 해제하고자 한 에드워드 핼릿 카(Edward Hallett Ted Carr, CBE, 1892–1982)의 말처럼, 작가의 작업은 우리가 역사라는 형식과 내용의 수용과 제공의 주체임을 적극 주창한다. 이때 예술가라는 직위는 사적으로 단편화된 위상에 불과하거나, 그럼에도 무엇보다 자신일 수 있음을 고유하게 확증하는 증거이자 단서로서 그저 제시될 뿐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그가 자신의 작업을 ‘음식 제공 서비스(catering)’(〈산 것과 죽은 것들의 케이터링〉(2024)의 경우)나 ‘쟁반 요리(platter)’(〈Excavated Fragments for Platter〉(2024)의 경우)에의 비유는 유효하게 들리며, 이와 같은 접근이 저자와 독자의 자리를 지우고 그 경계를 흐려낸다는 점에서 또한 그렇다 하겠다. 그러하듯, 홍자영의 사유는 미적 실현물로서의 매체를 따라 엄밀히는 사적인 주관의 영역으로 분류될 자기 조형의 고유한 언어를 공적인 것으로 승화하고, 역사와 문화의 맥락에서 추출된 이미지를 제안하는 가운데서 그것을 통해 스스로 선 개인, 즉 당대의 한 표상으로서 예술가의 위상을 확인하는 한편, 그로부터 관객을 또 하나의 능동적인 동시대의 주체로서 임명한다는 점에서 제 의미와 가치를 명료하게 구축하려 한다.
tures/notes-on-sculpture-part-2-211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