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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원화/ 시각문화 연구자
정원과 무덤 사이에서
조각이란 뭘까, 그건 여전히 중요한 질문일까? 홍자영은 조각이 "산 자를 위한 공간에 있을 때는 정원이 되고, 죽은 자를 위 한 공간에 있을 때는 무덤이 된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조각이 본래 미술관에 전시되는 자족적 대상이 아니었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는 자명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장소를 만드는 건축적 요소이자 제의적 이벤트를 뒷받침하는 무대 장치의 일부 로서 조각의 전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조각적 대상은 아파트 단지의 입구를 장식하고 케이팝 뮤직비디오의 배경으로 들어간 다. 이처럼 조각을 일시적 또는 지속적으로 외부와 구별되는 상징적 영역을 구축하는 물질적 장치로 보면, 직장인이 회사 책 상에 작고 예쁜 물건들을 늘어놓는 것도 자기 영토를 표시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조각적’이다. 물론 이런 접근은 진지한 조각 가들의 원성을 살 것이다. 조각이 장소 만들기에 종속되어 자율적 예술로서의 위상을 보장받지 못했던 전근대적 질서로 퇴 행할 수는 없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과거에 위대한 조각 작품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인류 역사상 가장 장엄한 조 각 작품들은 대부분 특별한 장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현대 조각은 장소로부터 자유로워진 이래 끊임없는 실존적 고뇌에 시달리며 자기 부정과 재창안의 부담을 떠안았다. 홍자영 은 그런 역사적 무게를 짊어지기보다는 장소 만들기의 풍요로운 전통 안에서 조각적인 것의 잠재력을 재발견하고 활성화하 는 데 조금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데리고 미술 전시장 바깥으로 나가는 데 거리낌이 없고, 전시를 만 드는 일을 “출장 요리”를 나가서 작은 파티를 준비하는 것에 빗댄다. 실제로 작가는 최근에 주말 농장에서 일 년간 가꾼 텃밭 과 그 수확물로 차려낸 잔칫상을 “제철 조각”으로 제시하면서 이를 다채롭게 향유할 수 있는 “야외 전시”를 열기도 했다. 《Farm-to-Pedestal: 밭에서 난 제철 조각》(2025)은 식용, 비식용 식물이 섞여 자라는 정원을 예술적 경험의 장으로 연출하 면서, 자연의 주기적 시간과 인간의 목적 지향적 활동이 중첩되고 식물들의 실용적 가치가 그 무용한 아름다움과 구별되지 않는 비일상적이고 조금은 마법적인 축제를 지향한다. 이 행사는 일상의 리듬을 멈추고 변화와 생성의 여지를 향유하는 온 화한 카니발처럼 기획되었고, 그런 점에서 삶이 곧 예술이며 생명이 번성하는 대지가 곧 낙원이라는 단순한 도식과는 구별 된다. 전시는 하룻밤의 꿈처럼 잠시 열리고 금세 닫힌다. 작가의 ‘작품’들은 계절의 흐름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섭식을 포함한 참여자들의 행위 속에서 자연스럽게 흩어지지만, 운이 좋다면 쉽게 지워지지 않는 어떤 흔적을 남길 지도 모른다.
죽은 자를 위한 무덤조차도 사용 기한이 있는 지금 시대에 반영구적인 장소라는 아이디어는 그 자체로 조금 허황되게 들린 다. 그러니까 조각가가 정말로 장소 만들기에 헌신하기를 원한다고 해도, 불멸을 갈망하는 그의 작품은 영구 설치될 곳을 찾 지 못한 채 떠도는 현대적 숙명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홍자영은 비극적 영웅처럼 그 운명에 저항하는 대신 명랑한 유랑극단 의 주인이 되는 편을 택한다. 그들은 매번 특정한 장소에 짐을 풀고 그곳의 풍경과 공기를 일시적으로 변조한 후에 손님을 받 는다. 《겨울 조각과 더운 야채》(2025)는 큰 창으로 야외 정원의 겨울 풍경이 그대로 들어오는 갤러리 공간에 따뜻함을 기원 하는 불의 이미지를 덧입혀 정서적인 대류 효과를 발생시킨다. 단순히 차가움이나 뜨거움이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추운 계 절에 따뜻함을 바라는 마음이 있고 그것이 물질화된 사물들이 있다. 불은 꽃이 되고 춤이 되며 그 열기가 번져 나가면서 뭔지 모를 것들이 복작거리며 온기를 나누는 축제의 장을 이룬다. 전시의 중심에 있는 〈불구덩이 댄스 플로어〉는 불에 탄 종이의 불규칙한 모양을 본뜬 검정색 아크릴판 위로 빛을 내뿜고 북을 치고 몸을 흔드는 작은 몸들을 나열한다. 불꽃과 산의 형태적 유사성 때문에 산수화 속 이상향이 두께와 활력을 얻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관객은 그들 사이로 걸 어 들어가서 함께 춤출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환상적인 장면을 구성하는 조각적 대상들은 자칫하면 밟아버릴 수도 있을 만 큼 작기 때문이다.
확대된 미니어처 정원 같은 애매한 스케일은 홍자영의 조각적 설치에 ‘그림 같은’ 속성을 부여한다. 인형의 집은 내부에 공간 을 포함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가기엔 너무 크기에 다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는 순수하게 회화적인 것도 조각적인 것 도 아닌,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가 ‘친밀한 모드(inAmate mode)’라고 부른 상태를 발동시킨다.1 작은 미적 대상은 관객을 가까이 끌어당기고 그 미세한 표면에 시선을 고정시켜 그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의 감각을 휘발시킨다.
이를테면조선후기에유행한금강산모양의연적(벼루에먹을갈때쓰는물그릇)은산수풍경을손에쥘수있는크기로물 질화하는데, 눈길이 봉우리와 계곡을 형상화한 요철을 더듬는 경험은 시각적인 동시에 촉지적이다. 시선이 비육체적인 손가 락처럼 가상적인 접촉면을 그릴 때 마주 놓인 두 몸체 사이의 거리는 순간적으로 무효화된다. 하지만 보는 주체는 상상적 풍 경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표면을 훑고 있을 뿐이라서 영화적 몰입에 도달하진 못한다. 작은 미적 대상은 흡족함과 결 핍의 감각이 미묘하게 혼합된 불완전한 환영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하찮고 기만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실제 로 모리스는 시각적 표면에 친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세부 요소들을 조각에서 제거할 것을 요구했었다. 하지만 그 작은 것들은 시각적 포만감이나 현상학적 충만함 속에서 완결된 예술의 경험을 선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예술적 충동 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마음껏 의심할 수 있는, 의외로 즐거운 반성과 탐구의 자리를 개방할 수 있다.
홍자영이 사물들의 배치 속에서 가시화하는 장소는 대체로 아름답고 유토피아적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장소’나 실현 불가능한 이상향보다는 단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곳으로 나타난다. 관객은 바깥에서 그곳을 살펴볼 수도 있고 때로 그 장소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일종의 배우로 초대되기도 하지만 거기서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해피 엔딩은 없다. 예술은 삶과 하나가 아니라 아름답지만은 않은 삶의 한가운데에서 꿈꾸는 것이다. 만약 그 꿈이 영원히 계속된 다면 예술은 종교가 되고, 그런 것으로서 새로운 문명의 초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작가가 그렇게까지 거창한 기대를 하는 것 같진 않다.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이었던 《Between Lying Columns》(2024)는 1층에서 지하로 이어지는 건축적 구조 를 활용하여 고대 매장지를 발굴, 복원한 일종의 박물관처럼 조성되었다. 각각의 전시물들은 어떤 상실된 전체를 연상시키 는 파편적 상징처럼 서로 병치되거나 중첩되면서 관객의 시선을 실외에서 실내로, 지상에서 지하로 끌어당긴다. 그 동선의 끝에는 부장품으로 채워진 목곽 같기도 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래 정원 같기도 한 길고 야트막한 좌대가 있다. 〈산 것과 죽은 것들의 케이터링〉이라는 제목은 생사를 구별하지 않는 축제의 장소를 암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무덤도 정원도 아 니고, 단지 조각적 대상들을 배열하여 일련의 장면들을 구성한 미술 전시다.
죽음 이후의 구원에 대한 믿음은 커녕 삶의 가치조차 의심되는 세계에서 예술은 불신과 믿음이 모두 유예되는 아슬아슬한 경계 지대에 놓인다.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자. 조각이란 뭘까, 그건 여전히 중요한 질문일까? 지금 시점에서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은 ‘조각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일지도 모르겠다. 홍자영의 작업은 조각이 몸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부분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고, 눈과 몸의 관계에 개입할 수 있으며, 여기가 아닌 저기를 지향하도록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질기호적 인 세계 만들기를 위한 연습장이자 놀이터로서, 조각적 장은 무엇보다도 이미지를 저장하고 재생하는 원형적 미디어로서 우 리의 몸을 자극하고 재편할 잠재력을 지닌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만져지는 것과 접촉이 금지된 것 사이에서 작가와 관객, 머리와 발, 손과 눈, 유기적이고 광물적인 몸들이 서로를 밀고 당긴다. 그런 의미에서 장소는 우리가 만든 것이 자 우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홍자영이 보여주는 장소들은 친밀하지만 공공적이며, 친구들과 낯선 이들이 뒤섞여 잡다한 무 리를 이루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의도적인 근접성과 우연한 애착의 연쇄 속에서 뭔가 벌어지기를 기대하는 데 그렇게 큰 믿 음은 필요하지 않다. 작가의 말처럼, “사건을 위한 장치”로서 조각은 그 자체로 꽤 믿음직해 보인다.
1 Robert Morris, "Notes on Sculpture, part 2", Ar#orm 5, no.2 (1966): 20-23, https://www.artforum.com/features/notes-on-sculpture-part-2-211590/.
조각이란 뭘까, 그건 여전히 중요한 질문일까? 홍자영은 조각이 "산 자를 위한 공간에 있을 때는 정원이 되고, 죽은 자를 위 한 공간에 있을 때는 무덤이 된다"라고 말하는데, 이는 조각이 본래 미술관에 전시되는 자족적 대상이 아니었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다는 자명한 사실을 상기시킨다. 장소를 만드는 건축적 요소이자 제의적 이벤트를 뒷받침하는 무대 장치의 일부 로서 조각의 전통은 현재 진행형이다. 조각적 대상은 아파트 단지의 입구를 장식하고 케이팝 뮤직비디오의 배경으로 들어간 다. 이처럼 조각을 일시적 또는 지속적으로 외부와 구별되는 상징적 영역을 구축하는 물질적 장치로 보면, 직장인이 회사 책 상에 작고 예쁜 물건들을 늘어놓는 것도 자기 영토를 표시하는 행위라는 점에서 ‘조각적’이다. 물론 이런 접근은 진지한 조각 가들의 원성을 살 것이다. 조각이 장소 만들기에 종속되어 자율적 예술로서의 위상을 보장받지 못했던 전근대적 질서로 퇴 행할 수는 없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과거에 위대한 조각 작품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인류 역사상 가장 장엄한 조 각 작품들은 대부분 특별한 장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의 결과였다.
현대 조각은 장소로부터 자유로워진 이래 끊임없는 실존적 고뇌에 시달리며 자기 부정과 재창안의 부담을 떠안았다. 홍자영 은 그런 역사적 무게를 짊어지기보다는 장소 만들기의 풍요로운 전통 안에서 조각적인 것의 잠재력을 재발견하고 활성화하 는 데 조금 더 관심이 있는 듯하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을 데리고 미술 전시장 바깥으로 나가는 데 거리낌이 없고, 전시를 만 드는 일을 “출장 요리”를 나가서 작은 파티를 준비하는 것에 빗댄다. 실제로 작가는 최근에 주말 농장에서 일 년간 가꾼 텃밭 과 그 수확물로 차려낸 잔칫상을 “제철 조각”으로 제시하면서 이를 다채롭게 향유할 수 있는 “야외 전시”를 열기도 했다. 《Farm-to-Pedestal: 밭에서 난 제철 조각》(2025)은 식용, 비식용 식물이 섞여 자라는 정원을 예술적 경험의 장으로 연출하 면서, 자연의 주기적 시간과 인간의 목적 지향적 활동이 중첩되고 식물들의 실용적 가치가 그 무용한 아름다움과 구별되지 않는 비일상적이고 조금은 마법적인 축제를 지향한다. 이 행사는 일상의 리듬을 멈추고 변화와 생성의 여지를 향유하는 온 화한 카니발처럼 기획되었고, 그런 점에서 삶이 곧 예술이며 생명이 번성하는 대지가 곧 낙원이라는 단순한 도식과는 구별 된다. 전시는 하룻밤의 꿈처럼 잠시 열리고 금세 닫힌다. 작가의 ‘작품’들은 계절의 흐름 속에서, 그리고 무엇보다도 섭식을 포함한 참여자들의 행위 속에서 자연스럽게 흩어지지만, 운이 좋다면 쉽게 지워지지 않는 어떤 흔적을 남길 지도 모른다.
죽은 자를 위한 무덤조차도 사용 기한이 있는 지금 시대에 반영구적인 장소라는 아이디어는 그 자체로 조금 허황되게 들린 다. 그러니까 조각가가 정말로 장소 만들기에 헌신하기를 원한다고 해도, 불멸을 갈망하는 그의 작품은 영구 설치될 곳을 찾 지 못한 채 떠도는 현대적 숙명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홍자영은 비극적 영웅처럼 그 운명에 저항하는 대신 명랑한 유랑극단 의 주인이 되는 편을 택한다. 그들은 매번 특정한 장소에 짐을 풀고 그곳의 풍경과 공기를 일시적으로 변조한 후에 손님을 받 는다. 《겨울 조각과 더운 야채》(2025)는 큰 창으로 야외 정원의 겨울 풍경이 그대로 들어오는 갤러리 공간에 따뜻함을 기원 하는 불의 이미지를 덧입혀 정서적인 대류 효과를 발생시킨다. 단순히 차가움이나 뜨거움이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추운 계 절에 따뜻함을 바라는 마음이 있고 그것이 물질화된 사물들이 있다. 불은 꽃이 되고 춤이 되며 그 열기가 번져 나가면서 뭔지 모를 것들이 복작거리며 온기를 나누는 축제의 장을 이룬다. 전시의 중심에 있는 〈불구덩이 댄스 플로어〉는 불에 탄 종이의 불규칙한 모양을 본뜬 검정색 아크릴판 위로 빛을 내뿜고 북을 치고 몸을 흔드는 작은 몸들을 나열한다. 불꽃과 산의 형태적 유사성 때문에 산수화 속 이상향이 두께와 활력을 얻어 화면 밖으로 튀어나온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관객은 그들 사이로 걸 어 들어가서 함께 춤출 수 없는데, 왜냐하면 이 환상적인 장면을 구성하는 조각적 대상들은 자칫하면 밟아버릴 수도 있을 만 큼 작기 때문이다.
확대된 미니어처 정원 같은 애매한 스케일은 홍자영의 조각적 설치에 ‘그림 같은’ 속성을 부여한다. 인형의 집은 내부에 공간 을 포함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 들어가기엔 너무 크기에 다만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는 순수하게 회화적인 것도 조각적인 것 도 아닌, 로버트 모리스(Robert Morris)가 ‘친밀한 모드(inAmate mode)’라고 부른 상태를 발동시킨다.1 작은 미적 대상은 관객을 가까이 끌어당기고 그 미세한 표면에 시선을 고정시켜 그들이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공간의 감각을 휘발시킨다.
이를테면조선후기에유행한금강산모양의연적(벼루에먹을갈때쓰는물그릇)은산수풍경을손에쥘수있는크기로물 질화하는데, 눈길이 봉우리와 계곡을 형상화한 요철을 더듬는 경험은 시각적인 동시에 촉지적이다. 시선이 비육체적인 손가 락처럼 가상적인 접촉면을 그릴 때 마주 놓인 두 몸체 사이의 거리는 순간적으로 무효화된다. 하지만 보는 주체는 상상적 풍 경 속으로 들어간 것이 아니라 그 표면을 훑고 있을 뿐이라서 영화적 몰입에 도달하진 못한다. 작은 미적 대상은 흡족함과 결 핍의 감각이 미묘하게 혼합된 불완전한 환영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로 하찮고 기만적인 것으로 취급되는 경향이 있다. 실제 로 모리스는 시각적 표면에 친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모든 세부 요소들을 조각에서 제거할 것을 요구했었다. 하지만 그 작은 것들은 시각적 포만감이나 현상학적 충만함 속에서 완결된 예술의 경험을 선사하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예술적 충동 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마음껏 의심할 수 있는, 의외로 즐거운 반성과 탐구의 자리를 개방할 수 있다.
홍자영이 사물들의 배치 속에서 가시화하는 장소는 대체로 아름답고 유토피아적이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장소’나 실현 불가능한 이상향보다는 단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은 곳으로 나타난다. 관객은 바깥에서 그곳을 살펴볼 수도 있고 때로 그 장소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일종의 배우로 초대되기도 하지만 거기서 언제까지나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해피 엔딩은 없다. 예술은 삶과 하나가 아니라 아름답지만은 않은 삶의 한가운데에서 꿈꾸는 것이다. 만약 그 꿈이 영원히 계속된 다면 예술은 종교가 되고, 그런 것으로서 새로운 문명의 초석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작가가 그렇게까지 거창한 기대를 하는 것 같진 않다.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이었던 《Between Lying Columns》(2024)는 1층에서 지하로 이어지는 건축적 구조 를 활용하여 고대 매장지를 발굴, 복원한 일종의 박물관처럼 조성되었다. 각각의 전시물들은 어떤 상실된 전체를 연상시키 는 파편적 상징처럼 서로 병치되거나 중첩되면서 관객의 시선을 실외에서 실내로, 지상에서 지하로 끌어당긴다. 그 동선의 끝에는 부장품으로 채워진 목곽 같기도 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모래 정원 같기도 한 길고 야트막한 좌대가 있다. 〈산 것과 죽은 것들의 케이터링〉이라는 제목은 생사를 구별하지 않는 축제의 장소를 암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 무덤도 정원도 아 니고, 단지 조각적 대상들을 배열하여 일련의 장면들을 구성한 미술 전시다.
죽음 이후의 구원에 대한 믿음은 커녕 삶의 가치조차 의심되는 세계에서 예술은 불신과 믿음이 모두 유예되는 아슬아슬한 경계 지대에 놓인다. 처음의 질문으로 되돌아가자. 조각이란 뭘까, 그건 여전히 중요한 질문일까? 지금 시점에서 어쩌면 더 중요한 질문은 ‘조각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일지도 모르겠다. 홍자영의 작업은 조각이 몸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부분적으로 재배치할 수 있고, 눈과 몸의 관계에 개입할 수 있으며, 여기가 아닌 저기를 지향하도록 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물질기호적 인 세계 만들기를 위한 연습장이자 놀이터로서, 조각적 장은 무엇보다도 이미지를 저장하고 재생하는 원형적 미디어로서 우 리의 몸을 자극하고 재편할 잠재력을 지닌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만져지는 것과 접촉이 금지된 것 사이에서 작가와 관객, 머리와 발, 손과 눈, 유기적이고 광물적인 몸들이 서로를 밀고 당긴다. 그런 의미에서 장소는 우리가 만든 것이 자 우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홍자영이 보여주는 장소들은 친밀하지만 공공적이며, 친구들과 낯선 이들이 뒤섞여 잡다한 무 리를 이루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 의도적인 근접성과 우연한 애착의 연쇄 속에서 뭔가 벌어지기를 기대하는 데 그렇게 큰 믿 음은 필요하지 않다. 작가의 말처럼, “사건을 위한 장치”로서 조각은 그 자체로 꽤 믿음직해 보인다.
1 Robert Morris, "Notes on Sculpture, part 2", Ar#orm 5, no.2 (1966): 20-23, https://www.artforum.com/features/notes-on-sculpture-part-2-211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