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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현/ 기획자
눈으로 더듬는 조각
-홍자영의 조각에 대하여

어릴 적 박물관에 가면 꼭 지형지물을 만들어 놓은 디오라마가 있었다. 조선시대 생활상을 보여주거나 특정 지역의 산과 도시 풍경을 조망할 수 있게 하는 모형은 박물관의 중요한 볼거리 중 하나였다. 손가락 한 마디만한 작은 크기의 사람과 집, 마을을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내가 발견한 신기한 장면을 친구에게도 보라며 손가락을 뻗어 가리키곤 했다. 시대가 흘러 그 자리는 사용자의 터치로 화면을 확대하거나 세부 정보를 볼 수 있는 디지털 키오스크나 미디어월로 점차 대체되고 있다.

관객은 디오라마 내부로 몸을 이동할 수 없지만 눈만큼은 아주 적극적이고 세심하게 움직여야 한다. 어디를 보라고 구획되어 있지 않은 풍경을 아주 멀리서 조망하다가 아주 미세한 부분을 들여다보기까지 스스로 초점을 바꿔가며 구석구석 살펴야 자신이 원하는 재미를 찾을 수 있다. 누군가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차례차례 부분을 보기도 하고, 누군가는 눈에 닿는 대로 여기저기를 보기도 한다. 한편 디지털 스크린은 그토록 적극적인 눈의 움직임을 요청하지 않는다.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것은 눈이 아니라 손이다. 손으로 원하는 콘텐츠를 누르고 넘기고 확대하면 눈은 그걸 받아들인다. 점차 많은 것이 스마트폰 스크린을 통해 매개되는 시대에 사실 바빠지는 것은 손이다. 눈은 그저 손이 빠르게 바꿔 전해주는 이미지를 그대로 수용할 뿐이다.

홍자영의 조각을 보는 것은 마치 디오라마를 보듯 적극적인 눈의 움직임을 요한다. <12개의 산 9개의 돌 6리터의 물>(2020)을 처음 봤을 때도 그랬다. 가까이 다가갈 수 없도록 막힌 울타리 뒤에서 눈으로만 더듬으며, 흘러나오는 물 위에 떠다니는 것은 무엇인지, 산이 정말 열두 개인지, 산과 산 사이의 틈에는 뭐가 있는지 열심히 살펴본다. 몸을 움직이며 모든 부분을 보는 것이 익숙한, 심지어 작품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익숙한 미술 관객은 몸을 가까이 움직일 수도, 작품의 뒷면을 볼 수도 없는 상황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자꾸만 두 손가락으로 잡아당겨 확대해 보고 싶은 욕구를 누른 채, 맨눈으로 멀리 조망하다가 망원경을 통해 가까이 들여다보다가를 반복하면서 작가가 차려놓은 장치에 익숙해진다.

같은 전시에서 선보인 작품 <peepject_두 개의 눈구멍X3>(2018-2020)은 더욱 적극적으로 특정 시점을 관객에게 제시한다. 작가가 뚫어놓은 두 개의 눈구멍을 들여다보면 바깥의 풍경이, 스크린 속 화면이, 텍스트의 글자가 조금씩 부분을 보여준다. 애를 써서 열심히 들여다보아야 그 뒤의 무언가가 얼핏 얼핏 모습을 드러낸다. 몸을 움직이는 것은 소용없고 눈을 열심히 요령껏 옮겨야 한다. <기암괴석>(2022)에서도 시선을 제한하는 구멍이 등장한다. 관객은 기암괴석의 형태로 뚫린 구멍을 통해 그 너머의 풍경을 본다. 그것은 시선을 제한하는 풍경인 동시에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시선을 움직이게 하는 틀이다. 아무런 제한이 없을 때는 보지 않을 곳을 더욱 적극적으로 탐색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홍자영의 작업은 몸보다 눈을 열심히 움직이게 한다. 때때로 몸을 써서 시선을 맞춰야 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중심이 되는 것은 눈의 적극적인 움직임이다. 그렇다면 홍자영의 작업은 미술이 모더니즘의 체계를 넘어서 신체를 개입시킨 위대한 역사를 거슬러 다시 시각중심주의로 회귀하는 것일까?

이번 전시에서 선보인 신작 <산수조각>(2023)은 범관의 <계산행려도>를 옮겨와 입체로 표현한다. 산수화 속 큼직한 돌산을 모래로 조각한 뒤 이를 3D 스캔하고 프린트하여 제작했다. 작가는 동양 산수화에 내재된 ‘와유’ 개념에 영향을 받아 산수화의 풍경을 입체화했다고 밝혔다. ‘와유’는 ‘누워서 노닐다’는 의미로 남북조시대의 화가 종병이 주장한 후, 북송시대의 화가들을 거치면서 동양 산수화의 기본 개념이 되었다. 현실의 신체는 누워 있지만 산수화를 감상하며 정신적 공간에서 유희한다는 것이다. 길게 늘어진 산수의 풍경은 하나의 시점으로 수렴되는 것이 아니라 화가가 마음에 담은 여러 경치를 모아서 한 폭에 표현한 것이다. 가로로 길게 펼쳐지거나 세로로 길게 늘어지는 족자 위에 산수의 풍경을 그려, 마치 실제 산수를 거닐 듯이 눈으로 풍경을 거닐며 여행하는 것이다.

풍경을 거니는 신체의 이동을 그대로 화면에 담아내기 때문에 자연스레 풍경은 하나의 시점으로 포섭되지 않고 이동에 따른 시점의 변화를 포함한다. 서구의 풍경화가 원근법에 기반하여 하나의 시점으로 포섭되는 장면을 그렸던 것과 달리, 동양 산수화는 한 화면에 여러 시점을 복합적으로 담으며 적극적인 눈의 움직임과 그에 결부된 정신 작용을 요구한다. 서양의 시각중심주의에서 눈이 고정된 시점의 세계를 인식하는 데 그친다면, 동양의 세계관에서 눈은 적극적으로 이동하며 펼쳐진 풍경 속 다양한 시점과 관점, 내재된 관념을 읽어내야 한다. 특히 <계산행려도>는 근경과 중경, 원경을 각각 다른 시점과 주제로 표현해낸 탁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홍자영은 이러한 동양적 세계관에 영향을 받아, 그동안 소외되었던 시각의 다른 가능성을 발견한다. 거기에는 산수를 거닐며 특정 풍경을 선택하여 그려낸 창작자의 시선, 다양한 시점의 풍경을 눈으로 이동하며 자신만의 여행을 하는 감상자의 시선이 모두 포함된다. <산수조각>은 이차원의 평면인 <계산행려도>를 삼차원의 입체로 옮겨오면서 평면일 때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부적인 부분을 작가가 상상하여 만들어졌다. 평면에서는 보이지 않는 뒷면과 측면, 그리고 바위 안쪽의 생김새 등은 작가의 상상에 의해 새롭게 덧붙는다. 작가가 <계산행려도>의 풍경을 적극적으로 살펴보고 그 빈틈을 채우며 새로운 풍경을 완성하는 것이다. 작가의 눈이 더듬어 만들어낸 풍경을 다시 관객의 눈이 더듬는다. 관객은 삼차원의 입체로 펼쳐진 바위 산을 다시 눈으로 더듬는다. 매끈한 면과 촘촘한 굴곡이 뒤섞여 나타나는 돌산의 표면을 눈으로 하나하나 만지듯이 바라보게 된다. 그것은 서양의 시각중심주의에서는 시도한 바 없는, 만지듯이 대상을 보는, 촉각적인 시각이다.

이에 더해, 홍자영의 작업에는 자주 흐르는 물이 등장한다. 물의 움직임은 시간을 내재하며 동시에 고정되지 않은 일시적 풍경을 제공한다. 변화하는 물의 움직임 또한 그것을 포착하는 시선의 적극성을 요청한다. <A Piece of Ceiling>(2022)의 재료는 왁스를 바른 자작나무 합판이라는 물리적 요소로만 단순하게 기술되지만, 실제 이 작품을 구성하는 요소는 그에 한정되지 않는다. 전시장 바닥에 놓인 <12개의 산 9개의 돌 6리터의 물 중 8개의 산과 6리터의 물>(2020/2022)의 수조의 물에 반사된 빛이 <A Piece of Ceiling> 위에서 일렁인다. 관객은 고개를 들어 천장 위에서 일렁이는 풍경, 손에 닿을 듯하지만 닿지 않는 풍경을 눈으로 더듬는다. 계속해서 변화하는 물의 움직임은 고정된 대상보다 더 적극적으로 들여다보며 인식해야 한다.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물을 담은 작품들도 있다. <12개의 산 9개의 돌 6리터의 물>과 <Waterplace>(2021), <Wall Fountain>(2022)은 계속해서 물을 내뿜는 분수를 포함해 더 역동적인 물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나아가 <산수조각>은 그것을 둘러싼 물과 연무에 파묻힌다. 튀어오르는 물방울이 수면 위에 파장을 일으키고 조각에도 물방울이 맺히게 한다. 연무는 조각을 휘감으며 흩날리면서 정지된 조각에 운동성을 더한다. 관객은 흩날리는 안개 사이로 조각의 형태를 더듬으며 작가가 만든 풍경을 바라본다.

이러한 시각적 더듬기, 시각의 촉각화는 전통적 장식의 일부를 재현하는 작업에서도 나타난다. 전통 양식 건축물의 기둥, 오래된 벽화, 괴석 받침 등의 장식적 요소를 본떠 조각으로 만든다. 작가는 복잡하고 화려한 장식의 일부를 선택하고 재배치하여 새로운 장면을 만든다. 전체 건축물에서는 크게 눈에 띄지 않았던 부분이 본래의 맥락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운 장면 안에서 주목될 수 있도록, 그리하여 꼼꼼히 살펴볼 수 있도록 한다. 분수(<Waterwall>, 2021), 기둥의 머리(<Pillar head>, 2021), 파사드(<Temple Facade>, 2021) 등의 장식이 마치 부조처럼 벽에 달라붙어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또한 이 작품들은 원본을 재현하면서 모래와 왁스를 섞어서 표현거나 스펀지에 젯소를 칠해 거친 질감을 드러낸다. 원본보다 거친 재료로 만들어진 섬세하고 화려한 장식은 매끄러운 원본과 다르게 그 촉감이 시각으로 느껴진다.

이번 전시에서 <산수조각>을 받치고 있는 <팔각괴석받침>(2023)은 창경궁 자경전 터에 있는 괴석 받침을 본떠 만든 것이다. 본래의 괴석 받침은 창경궁 방문객이 앉을 수 있는 벤치 옆에서 그저 일상의 사물로 자연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홍자영은 받침을 그 맥락에서 떼어와 자신이 만든 새로운 장면 안에서 다시 보기를 요청한다. 뒤편에는 <The Gate of Wind and Water>(2023)가 병풍처럼 배경으로 놓이고 그 앞에는 <팔각괴석받침>과 <산수조각>이 놓여 하나의 장면을 이룬다. 본래의 풍경 안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던 부분이 홍자영의 장면 안에서는 눈에 두드러지는 부분으로 등장한다.

작가가 만들어낸 새로운 장면은 분명하게 어디가 정면인지를 암시한다. 관객은 작가가 제시하는 정면에 서서 열심히 눈을 움직여 조각을 더듬는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만큼은 눈만이 아니라 몸을 움직여 조각의 뒷면을 돌아보기를 요청한다. 작가가 제시하는 장면의 방향을 살펴보기를 요청하는 동시에, 그와는 다른 시선을 찾기를 강력히 요청한다. 이차원의 평면에서 삼차원의 ‘입체’가 된 <산수조각>은 한 방향이 아니라 여러 방향에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작가가 제시하는 하나의 방향으로 보도록 구성되었던 장면이 이제는 여러 방향에서 움직이며 보는 장면으로 변화한 것이다. 여러 방향을 갖게 된 홍자영의 작업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이 기대된다.

전시 <조각모음>의 아카이브 테이블에는 작가의 작업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fragment)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곳에 놓인 홍자영의 작은 조각들은 거친 면과 매끄러운 면, 부드러운 굴곡과 깎아지르는 선, 움푹 들어간 곳과 튀어나온 곳이 뒤섞여 구성되어 있었다. 손으로 만져보지 않아도 눈은 자연스럽게 그 깊은 골짜기와 높은 봉우리를 따라 더듬어 만지게 된다. 디지털 미디어를 매개로 끝없이 새로운 콘텐츠를 보는 시대다. 시각 정보는 넘쳐나지만 오히려 눈은 적극적으로 대상을 찾거나 들여다보거나 만질 필요가 없다. 모든 것이 스크린을 매개로 평평하게 보여지는 시대에, 홍자영의 조각은 관객이 더 적극적으로 눈을 쓰며 작품을 더듬기를 요청한다. 이로써 정지된 시선, 평평한 시선이 아니라 역동적인 시선, 입체적 시선을 발생시킨다.